가족이라는 이름의 덫: 열등감과 파멸 

가족이라는 이름의 덫 : 열등감과 파멸

작가의 말

어떤 날은, 아침에 눈을 뜨기가 두려웠다. 잠결에도 귓가를 맴도는 뉴스 속 이야기가 너무나 선명해서, 그게 현실이라는 걸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저, 이 세상 어딘가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짓눌렀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저런 비극이 일어날 수 있을까. 사람이, 정말 사람에게 저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그저 충격이었다. 그 다음엔 깊은 슬픔이 밀려왔고, 이내 알 수 없는 분노 같은 것이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아마 나뿐만은 아니었을 거다. 뉴스를 접한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리라 짐작한다. 그 안타까움과 놀라움, 그리고 어쩌면 우리 안에 숨겨져 있던 어떤 그림자를 마주하는 듯한 불편함까지도 말이다. 나도 그랬으니.

오랜 시간, 나는 인간의 마음속 깊이 자리한 열등감이라는 감정에 대해 생각해왔다. 그건 참 묘한 감정이다. 때로는 우리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동기가 되기도 하지만, 또 어떤 때는 아주 깊은 나락으로 끌고 내려가기도 한다. 특히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이 열등감은 더욱 복잡하고 미묘한 형태로 자라나는 것 같았다. 가장 가까운 이에게 느끼는 질투, 비교,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박탈감… 음, 생각해보니 나 역시 어린 시절, 형제들과의 사소한 비교 속에서 알게 모르게 열등감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그저 투정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감정의 씨앗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 될 수 있는지,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이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건, 바로 그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열등감과 복수심의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싶어서였다. 우리가 뉴스를 통해 접하는 끔찍한 사건들이 단순히 ‘악마 같은 인간’의 소행으로 치부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들 안에 무엇이 있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파괴적인 길로 이끌었을까? 그리고 그 비극의 씨앗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마음속 어딘가에도 존재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이 책을 통해,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독자들과 함께하고 싶다. 완벽한 해답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그런 해답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외면하고 싶었던 불편한 진실들을 마주하고, 그 감정의 뿌리를 함께 탐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될 거라 믿는다. 어쩌면 이 책이, 뉴스를 보며 가슴 아파했던 당신에게,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름의 굴레 속에서 힘겨워하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거면 충분하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당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진 감정들을 솔직하게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쩌면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작은 치유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우리가 함께 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나면, 분명 조금은 더 단단해지고, 조금은 더 따뜻해진 우리가 되어 있을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

1부: 비극의 서막

    1장. 차가운 뉴스 한 줄: 믿기지 않는 현실

그날 아침, 여느 때와 다름없이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주방 가득 퍼지는 원두 향만큼이나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습관처럼 틀어놓은 TV에서는 아나운서의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배경 소음처럼 들렸다. 그런데 문득, 귓가를 때리는 몇몇 단어들이 있었다. ‘가족’, ‘살해’, ‘복수심’… 순간, 손에 들고 있던 머그잔이 흔들렸다. 커피가 넘칠 뻔했다.

화면을 돌아보니, 낯선 남자의 얼굴이 흐릿하게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스크롤 되는 자막. ’60대 남성, 사제 총기로 아들 살해… 전 부인에 대한 복수심이 동기 추정’. 멍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는 느낌이었다. 사제 총기? 아들? 복수심? 이 단어들이 한 문장 안에, 그것도 ‘가족’이라는 이름과 함께 놓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비현실적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 이건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 아닌가. 현실에서, 그것도 내가 사는 이 땅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커피는 식어갔고, 나는 꼼짝없이 소파에 앉아 뉴스를 지켜봤다. 아나운서는 담담한 목소리로 사건의 경위를 설명했다. 이혼한 전 부인에 대한 복수심이 아들을 향한 비극으로 이어졌을 가능성. 아들이 전 부인의 성공을 상징하는 존재였다는 전문가의 분석. 그리고, 범행이 일어난 날이 가해자의 생일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까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생일날, 아들을 초대해서… 아, 정말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잔혹함이었다.

그날 하루 종일, 그 뉴스는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빨래를 개다가도, 심지어 밥을 먹다가도 불쑥불쑥 그 장면이 떠올랐다. 억지로 다른 생각을 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마치 끈적한 거미줄처럼 달라붙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가장 의아했던 건, ‘어떻게 아버지라는 사람이 아들을 죽일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본능이라고들 하지 않나.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그런데 그 본능을 거스르고, 자신의 피붙이를 향해 총구를 겨눌 수 있다니. 대체 어떤 감정이, 어떤 상황이 사람을 그 지경까지 몰아세울 수 있는 걸까.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열등감. 복수심. 그 단어들이 자꾸만 맴돌았다. 그래, 살면서 열등감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 역시 그랬다. 어릴 적엔 공부 잘하는 친구에게, 커서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지인에게, 때로는 배우자의 능력에 알게 모르게 질투와 열등감을 느꼈던 적이 있다. 그 감정은 참으로 간사해서, 나를 채찍질해 더 노력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를 갉아먹고 초라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열등감이, 이런 극단적인 파멸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다.

특히 ‘가족’이라는 관계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 나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가족은 가장 안전해야 할 울타리 아닌가. 세상의 모든 풍파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줄 것이라 믿는 마지막 보루. 그런데 그 안에서 열등감과 복수심이 싹트고 자라, 결국 서로를 파멸시키는 덫이 될 수 있다니. 이건 마치, 가장 따뜻해야 할 불이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화마가 되는 것과 같았다.

문득, 오래전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어릴 적, 동생이 나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린다고 아버지가 칭찬했을 때, 나는 며칠 밤낮을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저 아이의 치기 어린 질투였지만, 그때 느꼈던 서운함과 ‘나는 왜 안 될까’ 하는 초라함은 꽤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물론 그게 이런 비극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그 작은 씨앗이 자칫 잘못하면 얼마나 큰 독이 될 수 있는지, 지금 와서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뉴스는 계속해서 사건의 배경을 파고들었다. 20년 전 이혼했던 부인의 명의로 된 아파트에 거주하며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느꼈을 무력감과 박탈감. 아들이 전 부인의 성공에 대한 상징적 승계자였다는 분석. 모든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는 듯했지만, 동시에 더 큰 의문이 밀려왔다. 한 인간의 내면에 얼마나 깊은 상처와 분노가 쌓여야, 그토록 끔찍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걸까. 그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였을까.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증오의 대상이었을까.

나는 이 뉴스를 접하면서, 단순히 한 사건의 비극을 넘어선 무언가를 느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어딘가에, 혹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어두운 그림자 같았다.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인간 본연의 잔인함, 그리고 그것이 가장 가까운 관계 속에서 어떻게 폭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섬뜩한 경고.

이 책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열등감과 복수심의 실체를 파고들고 싶었다. 단순히 ‘나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면에 숨겨진 심리적, 사회적 요인들을 함께 탐색하고 싶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 비극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 우리는 이 상처를 통해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찾아보고 싶었다. 믿기지 않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할까. 그 질문이 이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2장. 아버지라는 이름의 가면

뉴스 속 그 남자를 보면서, 나는 참으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분명 그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였다. 분노해야 마땅한. 그런데 동시에, ‘아버지’라는 이름이 주는 어떤 무게감 때문이었을까. 그 모자이크 처리된 얼굴 뒤에서, 나는 어쩐지 한 인간의 처절한 고통 같은 것을 엿보는 듯한 기시감을 지울 수 없었다. 음, 물론 그가 저지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를 그토록 비극적인 선택으로 몰아넣은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에게 ‘아버지’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였을까.

‘아버지’. 그 단어는 참으로 무겁다.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 가족을 부양하고, 강인하며, 흔들림 없는 기둥 같은 존재. 늘 든든하고, 때로는 엄격하지만, 결국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람. 우리는 그런 이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강요받으며 자라왔고, 많은 아버지들 또한 그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나 역시 어릴 적,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뒷모습에서, 나는 늘 묵묵한 책임감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묵묵함 뒤에는 얼마나 많은 고뇌와 불안이 숨겨져 있었을까.

뉴스 속 그 남자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분명 ‘아버지’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왔을 테다. 어쩌면 ‘성공한 가장’의 가면을, 혹은 ‘가족을 책임지는 든든한 남편’의 가면을 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가면 뒤에는, 20년 전 이혼한 전 부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며 살아야 했던 한 남자의 처절한 무력감과 박탈감이 숨어 있었다고 했다. 생각해 보라. 한때 자신이 책임져야 했던 가족에게, 이제는 오히려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상황. 그것도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 속에서 그는 얼마나 많은 열등감과 자존감의 상실을 겪었을까.

가면이라는 게 그렇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안쪽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을 때가 많다. 사회가 요구하는 ‘아버지’의 역할, ‘남편’의 역할. 그 역할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다 보면, 본래의 자신은 점점 더 작아지고 초라해지는 법이다. 나는 주변에서도 그런 아버지들을 종종 보았다. 겉으로는 호탕하게 웃고 농담을 던지지만, 술에 취하면 세상의 모든 불만을 토해내던 옆집 아저씨. 늘 자식들에게 ‘공부해라, 성공해라’를 외치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에는 만족하지 못하던 친구의 아버지. 그들의 가면 뒤에는 어떤 얼굴이 숨어 있었을까. 아마도 뉴스 속 그 남자와 비슷한, 깊은 열등감과 좌절감이 자리하고 있었을 테다.

특히 경제적인 부분은 남성들에게 더욱 치명적인 열등감을 안겨주는 것 같았다. 사회는 남성에게 ‘능력’을 요구하고, 그 능력의 척도를 종종 ‘돈’으로 환산하곤 한다. 한때는 가장이었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그 남자가, 이제는 전 부인의 경제적 성공 아래 놓여 있었다는 사실. 그것은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 가치, 남성으로서의 자존감,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권위까지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이었을 테다. 그 박탈감은 얼마나 깊었을까.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분노와 무력감에 시달렸을까.

아들이 전 부인의 성공을 상징하는 존재였다는 전문가의 분석은 섬뜩했다. 아들은 그에게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열등감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거울이었을지도 모른다. 전 부인이 이룬 성공의 ‘승계자’라는 표현은, 아들이 그에게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느껴졌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아들을 볼 때마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전 부인의 성공을, 그리고 그 성공 뒤에 숨겨진 자신의 초라함을 마주해야 했을 것이다. 아,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는 관계가 아닐 수 없다.

그는 가면 뒤에 자신의 진짜 얼굴을 숨기고, 그 가면이 주는 무게에 짓눌려 살았을 것이다. 그 가면은 그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해 주었을지 모르지만, 동시에 그를 고립시키고, 그의 내면에 쌓인 열등감과 분노를 더욱 키우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결국 그 가면은, 그를 파멸로 이끄는 덫이 되어버린 셈이다.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거나, 혹은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이 비극을 보며, 우리 모두가 쓰고 있는 가면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가. 사회생활을 할 때의 가면, 친구들 앞에서의 가면, 심지어 가족 앞에서조차 우리는 어떤 가면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그 가면들이 우리를 지켜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를 갉아먹고, 우리 안의 어두운 그림자를 키우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 남자의 비극은, 어쩌면 가면 뒤에 숨겨진 열등감이 얼마나 무서운 괴물로 자라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섬뜩한 경고는 아니었을까. 우리는 그 가면 뒤에 숨겨진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있을까. 그 질문이 다음 이야기의 시작이 될 것 같다.

3장.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쌓인 열등감

2장에서 ‘아버지’라는 이름의 가면을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 가면 뒤에 숨겨진 가장 깊은 그림자는 바로 ‘열등감’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가면은 그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방패였을 테다. 그런데 말이다, 그 열등감이라는 것이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특히 가족이라는, 가장 따뜻하고 안전해야 할 울타리 안에서 말이다.

가족. 그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세상의 모든 시련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것 같은 든든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동시에, 가족은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될 수도 있다. 가장 가까운 이들이기에, 우리의 가장 깊은 상처를 건드릴 수 있고, 우리의 가장 은밀한 열등감을 자극할 수 있다. 음, 솔직히 나도 그랬다. 어릴 적, 나는 언니와 늘 비교당했다. 언니는 공부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 치고, 심지어 얼굴도 예쁘다는 칭찬을 들었다. 나는 그저 언니의 그림자 같았다. 부모님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언니처럼 해봐”, “언니는 저렇게 잘하는데 넌 왜 그러니” 같은 말들은 어린 내 마음에 작은 칼날처럼 박혔다. 그때마다 나는 ‘나는 왜 언니 같지 못할까’ 하는 초라함과 함께, 알 수 없는 분노 같은 것을 느꼈다. 그게 바로 열등감의 씨앗이었겠지.

뉴스 속 그 남자에게도, 가족은 어쩌면 그런 열등감의 온상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20년 동안 이혼한 전 부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며 살았다고 했다. 20년이라는 세월.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매 순간 자신의 무능력함과 전 부인의 성공을 비교하며 살았을 것이다. 한때는 자신이 가장이었고, 가족을 책임져야 했던 남자. 그런데 이제는 그 역할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현실. 그것은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었다. 남성으로서의 자존심,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까지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험이었을 테다.

생각해보면, 가족 안에서 열등감은 참으로 다양한 형태로 자라난다. 어떤 아이는 형제자매의 뛰어난 재능 앞에서 위축된다. 또 어떤 아이는 부모의 과도한 기대에 짓눌려 ‘나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부모 역시 자식의 성공을 통해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받으려 하기도 하고, 배우자의 능력에 대한 비교 속에서 은밀한 좌절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모든 것들이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아주 미묘하고 조용하게 쌓여간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 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갉아먹는 독이 자라나는 것이다.

특히 뉴스 속 그 남자에게 아들은, 단순한 자식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들은 전 부인이 이룬 사회적, 경제적 성공의 ‘상징적 승계자’라고 했다. 아들을 볼 때마다, 그는 전 부인의 성공을, 그리고 그 성공과 대비되는 자신의 실패를 끊임없이 상기해야 했을 것이다. 아들은 그에게 사랑의 대상이기 이전에, 자신의 열등감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거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 정말이지, 그 관계의 비틀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사랑해야 할 존재가 오히려 자신의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리는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것. 그건 지옥과도 같았을 테다.

열등감은 참으로 교활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속으로만 곪아 터진다. 가족 안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면 안 돼’라는 생각에, 우리는 자신의 열등감을 숨기고 억압하곤 한다. ‘괜찮아’, ‘별거 아니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차곡차곡 쌓여간다. 마치 오래된 먼지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쌓이다가 어느 순간 거대한 덩어리가 되어 우리를 덮쳐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 남자의 경우도 그랬을 것이다.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 열등감은 그의 내면에서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자라났을 테다.

나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우리 안에 숨겨진 열등감의 존재를 직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열등감을 서로에게 주고받으며 살아가는가. 그리고 그 열등감이 제대로 해소되지 못하고 쌓여갈 때,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괴물로 변모할 수 있는지를 이 사건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물론, 열등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아들러는 열등감이 인간을 발전시키는 동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건강하게 극복되지 못한 열등감은 병적인 집착과 파괴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뉴스 속 그 남자의 비극은, 바로 그 병적인 열등감이 빚어낸 참극이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덫에 걸려, 그는 자신의 열등감에 잠식당했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을 선택했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어쩌면,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쌓여만 갔던 그 열등감의 씨앗이었을 것이다. 그 씨앗이 어떻게 복수심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로 자라났는지,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2부: 균열의 심화

    4장. 복수심의 그림자: 끝나지 않은 과거

3장에서 나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쌓인 열등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열등감의 씨앗이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자라나 결국 어떤 형태로든 터져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그런데 말이다, 그 터져 나온 감정의 가장 어둡고 파괴적인 형태 중 하나가 바로 ‘복수심’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마치 깊은 늪에 빠진 사람이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듯, 복수심은 절박한 마음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뉴스 속 그 남자의 경우도 그랬을 것이다.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는 전 부인의 성공과 대비되는 자신의 초라함 속에서 깊은 열등감에 시달렸을 테다. 그 열등감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복수심’이라는 독으로 변질되어 갔을 것이다. 복수심. 그건 단순히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을 넘어선다. 그건 상처받은 자아가 ‘내가 당한 만큼 돌려주겠다’는 왜곡된 정의감을 품는 순간이다. 잃어버린 자존감을 되찾고, 빼앗긴 힘을 되찾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복수심은 결코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오히려 복수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복수의 대상을 파괴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파괴하고 만다. 마치 독을 품은 칼날이, 상대를 찌르기 전에 자신을 먼저 베는 것처럼 말이다.

그에게는 ‘끝나지 않은 과거’가 있었다. 20년 전의 이혼. 그것은 단순한 관계의 단절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자신이 실패한 남편이자, 무능한 가장이라는 낙인이 찍힌 사건이었을 테다. 그리고 그 낙인은 전 부인의 성공이라는 거울에 비춰져 매 순간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혼 후에도 전 부인 명의의 아파트에 살며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 그것은 그에게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 때마다 자신의 처지를 상기시키는 잔인한 현실이었을 테다. 과거는 그에게 현재를 지배하는 그림자였다. 그 그림자는 너무나 짙어서, 그는 결코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그림자 속에서, 그의 복수심은 점점 더 끈질기게 자라났다. 처음에는 막연한 분노였을 테다. ‘왜 나만 이렇게 되어야 하는가?’ 하는 원망. 그러다 점차 그 원망은 특정 대상, 즉 전 부인을 향한 증오로 변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증오는 아들을 향한 왜곡된 복수심으로 이어졌다. 아들이 전 부인의 ‘상징적 승계자’였다는 전문가의 분석은 섬뜩할 정도로 정확했다. 아들은 그에게 전 부인의 성공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존재였고, 그 성공은 곧 자신의 실패를 의미했다. 아들을 향한 복수는, 결국 전 부인에게 가장 큰 고통을 안겨주려는 처절하고 비뚤어진 시도였을 테다.

복수심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합리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고, 오직 ‘되갚음’이라는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질주하게 만든다. 그 남자의 마음속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20년 동안 쌓인 열등감과 분노는, 그를 점점 더 깊은 복수심의 나락으로 이끌었을 테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파국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직 복수만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에게 복수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마지막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살면서 크고 작은 복수심을 느껴본 적이 있다. 학창 시절, 나를 괴롭히던 친구에게 어떻게든 되갚아주고 싶었던 마음. 직장에서 나를 무시하던 상사에게 언젠가 나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 물론 그게 이런 극단적인 형태로 발현되지는 않았지만, 그 마음속에는 분명 상대방에게 고통을 주고 싶다는, 나의 상처를 되갚고 싶다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다행히 나는 그 그림자에 잠식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해소할 수 있었지만, 만약 그때 그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복수심은 결국 자기 자신을 가두는 감옥과도 같다. 그 감옥 안에서, 사람은 오직 과거의 상처와 증오만을 되새기며 살아간다. 미래를 향해 나아갈 힘을 잃고, 현재의 행복조차 느낄 수 없게 된다. 뉴스 속 그 남자는, 그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복수심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결국 더 큰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끝나지 않은 과거는 결국 현재를 집어삼키고, 미래마저 파괴한다. 복수심이라는 그림자는 그렇게 한 인간을, 그리고 그 주변의 모든 것을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에게 생일은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되었고, 아들은 사랑의 대상이 아닌 복수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그 복수심이 폭발한 가장 비극적인 순간, ‘생일날의 비극’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5장. 생일날의 비극

생일. 그 단어는 참 따뜻하다. 세상에 태어난 날을 축하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날. 나에게도 생일은 늘 특별한 의미였다. 어린 시절, 엄마가 직접 끓여주신 미역국 냄새와 아빠가 서툰 솜씨로 잘라주시던 케이크. 친구들의 축하 속에서 나는 늘 사랑받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데 뉴스 속 그 남자에게, 그의 생일은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되어버렸다. 아니, 그가 스스로 그 축복을 저주로 바꿔버린 것일까. 그 아이러니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뉴스는 말했다. “자신의 생일날 아들이 초대했다. 그런 가장 극적인 순간에 가장 극적인 방법을 통해 세상에 그러한 것을 표출했다고 본다.” 이 문장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생일상을 차렸을까. 아니면 그저 간단한 식사 자리였을까. 어떤 모습이었든, 아들은 아버지를 축하하기 위해 그 자리에 갔을 것이다. 어쩌면 오랜만에 마주하는 부자(父子)의 자리였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아들의 눈에는 어떤 감정이 담겨 있었을까. 아버지에 대한 연민? 혹은 오랜만에 만나는 어색함?

아마도 그 ‘아버지’는 그날을 오랫동안 계획했을 것이다. 20년 동안 쌓인 열등감과 복수심이 폭발할 ‘가장 극적인 순간’. 그는 생일이라는 축복의 가면 뒤에, 가장 잔혹한 복수를 숨기고 있었다. 아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 끝이다. 너희가 나에게 준 고통을, 내가 고스란히 돌려주마.’ 그런 끔찍한 다짐을 했을까. 아니면 마지막 순간까지도 망설였을까. 음,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어서, 나는 그 순간의 그의 내면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축복받아야 할 생일날,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사제 총기를 겨눴다. 총기. 그 단어는 내게 너무나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총기 범죄는 드문 일 아닌가. 그런데 그는 대체 어디서 그런 것을 구하고, 또 어떻게 아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을까. 그 순간, 그의 눈에는 무엇이 보였을까. 아들의 얼굴? 아니면 전 부인의 얼굴? 어쩌면, 자신의 초라한 과거와 무너진 자존감이 그를 덮쳤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아들은 더 이상 아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자신의 복수심을 해소할 대상, 전 부인에게 고통을 안겨줄 수단일 뿐.

그 비극의 순간, 아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의 눈빛에서 섬뜩함을 느꼈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하는 마음에 들떠 있었을까. 상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그것도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아들에게,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 인간성의 상실. 그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잔혹하게 만들었을까.

이 사건은 단순히 한 가족의 비극을 넘어선다. 그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쉽게 ‘덫’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섬뜩한 경고였다. 사랑과 지지가 있어야 할 곳에서, 열등감과 복수심이 독버섯처럼 자라나 결국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그 생일날의 비극은,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를 여실히 드러냈다.

나는 이 뉴스를 접하며,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겉으로는 화목해 보이는 가족들 속에서도, 얼마나 많은 열등감과 상처들이 곪아가고 있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의 가면 뒤에 자신의 진짜 고통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을까. 그 남자의 비극적인 선택은, 어쩌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소통의 부재와 감정의 억압이 빚어낸 또 다른 결과물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복수심은 결국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아니, 남기기는 한다. 지울 수 없는 상흔만을 남긴다. 그 생일날의 비극은, 한 아들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모든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전 부인에게는 아들을 잃은 슬픔과 함께, 전 남편의 복수심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온몸으로 느끼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남자 자신에게도, 그는 결국 살인자라는 끔찍한 낙인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복수는 결코 해방이 아니었다. 그것은 더 깊은 나락으로의 추락이었다.

축복이 저주로 변한 그 생일날. 그날의 비극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과연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증오의 씨앗을 얼마나 잘 들여다보고 있는가. 우리의 관계는 정말 건강한가. 피로 얼룩진 그날의 기억은, 가족이라는 이름의 상흔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제 그 상흔이 어떻게 가족 구성원들에게 각인되었는지, 다음 이야기에서 더 깊이 들여다보려 한다.

6장. 피로 얼룩진 관계

생일날의 비극. 그날의 총성은 한 아들의 생명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모든 이들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피로 얼룩진 관계. 그 말만큼이나 섬뜩하고 처절한 표현이 또 있을까. 나는 그 뉴스를 접한 이후로, 그 아들을 잃은 어머니, 즉 전 부인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대체 어떻게 이 비극을 견뎌내고 있을까.

뉴스는 그녀가 20대 젊은 나이에 전 남편의 등록금을 내주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벌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사는 이유는 아들이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고. 아, 그 문장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아들은 그녀의 삶의 이유이자, 희망이었을 테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키운 아들. 그 아들이, 자신과 이혼한 전 남편의 뒤틀린 복수심 때문에, 그것도 자신의 생일날, 가장 믿었던 아버지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 그 고통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마치 심장이 찢겨 나가는 듯한, 영혼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상흔이라는 게 그렇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마음속 깊이 새겨진 상흔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이 파고들어, 삶의 모든 순간을 지배하곤 한다. 그녀에게 아들의 죽음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삶 전체를 부정당하고, 존재의 이유를 송두리째 빼앗긴 것과 같은 절망이었을 테다. 그녀의 삶은 이제, 아들을 잃은 고통과 전 남편의 잔혹한 복수심이라는 상흔으로 영원히 얼룩져 버렸을 것이다.

복수심은 결국 이런 것이다. 가해자는 자신의 복수를 통해 ‘해방’을 얻으려 했을지 모르지만, 그가 남긴 것은 더 큰 고통과 파멸, 그리고 지울 수 없는 상흔뿐이었다. 그는 전 부인에게 가장 큰 고통을 안겨주려 했고, 그 목적은 달성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대가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아들을 잃은 고통을 전 부인에게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자신은 살인자라는 끔찍한 낙인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복수는 결코 승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모두를 패배자로 만드는 잔혹한 게임이었다.

나는 이 비극을 통해, 우리가 ‘가족’이라는 이름에 대해 얼마나 많은 착각을 하고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가족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이해로 묶인 공동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깊은 열등감과 증오, 그리고 파괴적인 복수심이 숨겨져 있을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가족은 때로는 가장 잔혹한 덫이 될 수도 있다는 섬뜩한 진실. 이는 나의 기존 생각을 완전히 뒤흔드는 전환점이었다.

우리는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부모의 사랑, 자식의 순종, 배우자의 이해. 하지만 그 당연함 뒤에는 때로 숨겨진 기대와 실망, 그리고 해소되지 못한 감정들이 곪아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뉴스 속 그 남자의 가족도 그랬을 것이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곪아 터진 열등감과 복수심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피로 얼룩진 상흔을 남기며, 모두를 파멸로 이끌었다.

그 상흔은 단순히 그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사회 전체에 던지는 경고였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보이지 않는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내면에는 깊은 상처와 분노가 곪아가고 있는 가족들. 우리는 그들의 고통에 얼마나 무관심했는가. ‘가족이니까 괜찮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비극의 씨앗을 방치하고 있었을까.

이 비극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과연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그림자를 직시할 용기가 있는가. 피로 얼룩진 그 상흔은, 우리에게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더 큰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그 남자를 그토록 잔혹하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한 인간을 악마로 변모시켰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이, 이 상흔을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가장 중요한 깨달음일 것이다. 이제 그 인간성의 상실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 때다.

3부: 상처와 성찰

    7장. 인간성의 상실: 무엇이 그를 악마로 만들었나

6장에서 우리는 피로 얼룩진 관계가 남긴 상흔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상흔은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무엇이 그 남자를 그토록 잔혹하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한 인간을 악마로 변모시켰을까?” 나는 이 질문 앞에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를 단순히 ‘악마’라고 단정 짓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쉬운 단정 뒤에는,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 그 단어는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존재를 지칭한다. 하지만 뉴스 속 그 남자는 분명 인간이었다. 살과 피를 가진, 감정을 느끼는 한 인간.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인간성’을 상실하고, 그토록 끔찍한 비극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나는 그가 한순간에 악마가 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치 서서히 퍼지는 독처럼, 그의 내면은 오랜 시간 동안 잠식당했을 것이다. 그 독의 이름은 열등감, 무력감, 박탈감, 그리고 복수심이었다.

20년이라는 세월.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전 부인의 성공과 대비되는 자신의 초라한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고통받았을 것이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나는 왜 저 사람처럼 되지 못할까?’ 이런 질문들이 그의 내면을 갉아먹었을 테다. 사회는 남성에게 ‘능력’을 요구하고,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는 그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함께, 전 부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깊은 무력감에 빠졌을 것이다. 그 무력감은 곧 분노로 변했고, 그 분노는 복수심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아마도 극심한 사회적 고립 속에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고통을 나눌 사람도, 도움을 요청할 곳도 없었을 테다. 우리는 종종 ‘남자는 울면 안 돼’, ‘남자는 강해야 해’라는 말로 스스로를 가두곤 한다. 그도 그랬을까. 자신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워, 혹은 아무도 자신의 고통을 이해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에, 그는 모든 감정을 내면으로 삭였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울타리 안에서도, 그는 진정한 소통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감정이 제대로 흐르지 않고 억압될 때, 그것은 결국 곪아 터져 파괴적인 형태로 발현될 수밖에 없다. 마치 꽉 막힌 댐이 결국 터져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 본성이라는 게 참으로 복잡하다. 우리는 누구나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사랑과 증오, 연민과 잔혹함. 이 모든 감정들이 우리 안에 공존한다. 어떤 환경과 조건이 인간 내면의 어두운 면을 촉발시키고, 그것을 극단으로 치닫게 만드는 걸까. 나는 그 남자의 비극을 보며, ‘나도 저럴 수 있을까?’ 하는 불편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다. 물론 그와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겠지만, 나 역시 살면서 깊은 좌절감이나 고립감을 느껴본 적이 있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고, 모든 것이 나를 짓누르는 듯한 기분. 그때 만약 나에게 어떤 트리거가 있었다면, 혹은 나의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인간성의 상실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서히 진행되는 과정이다. 열등감이 쌓이고, 분노가 곪아가고, 소통이 단절되고, 고립감이 심화되면서, 한 인간은 점점 더 자신만의 어두운 세계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그는 현실 감각을 잃고 오직 자신의 뒤틀린 감정에만 매몰된다. 결국 그 감정은 그를 지배하고, 그는 더 이상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뉴스 속 그 남자가 바로 그랬을 것이다.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는 스스로를 악마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겪었던 셈이다.

이 비극은 우리에게 개인의 문제만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보이지 않는 열등감과 고립감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의 신호를 얼마나 무심하게 지나쳤을까. ‘저 사람은 원래 저런 사람이야’라고 쉽게 판단하고,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인간성의 상실은 우리 모두에게 경고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감정을 솔직하게 소통하며, 고통받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이 비극을 통해 우리가 얻은 깨달음이, 더 이상 이런 참담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 사회를 위한 작은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남자의 비극적인 선택은, 결국 남겨진 자들에게 끝나지 않을 고통을 남겼다. 이제 그 고통의 무게를 함께 짊어져야 할 때다.

8장. 남겨진 자들의 고통: 끝나지 않을 슬픔

그날의 총성이 멎고, 세상은 다시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듯 보였다. 아침에는 해가 뜨고, 저녁에는 달이 떴다.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고, 뉴스 속 비극은 또 다른 자극적인 이야기들에 밀려 서서히 잊혀져 가는 듯했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날 이후로 시간이 멈춰버렸다. 바로 남겨진 자들. 그들의 고통은, 결코 끝나지 않을 슬픔으로 삶 속에 각인되었다.

나는 그 아들을 잃은 어머니, 즉 전 부인의 삶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왔다. 그녀는 “내가 사는 이유는 아들이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삶의 이유가 사라진 자리. 그 공허함은 대체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슬픔이라는 게 그렇다. 처음에는 폭풍처럼 몰아치다가, 시간이 지나면 잔잔해진다고들 한다. 하지만 어떤 슬픔은 결코 잔잔해지지 않는다. 그건 마치 몸의 일부가 잘려나간 것처럼,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삶의 모든 순간에 통증을 안겨준다.

그녀에게 아들의 죽음은 단순한 상실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한순간에 파괴된 경험이었을 테다. 아들과 함께 꿈꿨던 모든 미래가 사라지고, 아들과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들조차 고통으로 변질되었을 것이다. 아들의 웃음소리, 아들의 손길, 아들의 체온…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이제 아물지 않는 상흔으로 남아 매 순간을 괴롭힐 것이다.

슬픔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어떤 날은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무기력함으로, 어떤 날은 세상 모든 것에 대한 분노로, 또 어떤 날은 ‘내가 그때 그랬더라면’ 하는 지독한 죄책감으로. 그녀의 일상은 완전히 무너졌을 테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조차 고통이었을 테고, 식사를 하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을 것이다. 평범했던 모든 것이 이제는 고통의 기억과 연결되어, 그녀를 끊임없이 과거의 비극 속으로 끌고 들어갔을 것이다.

사회는 종종 남겨진 자들에게 ‘힘내세요’, ‘시간이 약이에요’ 같은 말을 건넨다. 물론 위로의 말일 테다. 하지만 그 말들은 때로 그들에게 더 큰 부담과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 ‘내가 아직도 슬퍼하면 안 되는 건가?’, ‘언제까지 이래야 할까?’ 하는 자책감에 시달리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슬픔이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어떤 슬픔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삶의 일부가 되어, 영원히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슬픔이다.

그녀는 어쩌면 이제 ‘아들을 잃은 어머니’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동정과 연민, 혹은 호기심 어린 시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 시선들 속에서 그녀는 또 다른 고통을 느꼈을 테다. 홀로 감당해야 하는 슬픔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웠을까. 세상은 그녀에게 ‘이겨내라’고 말하지만,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자신의 삶의 이유가 사라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 잔혹하게도. 그녀는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할 것이다.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그 모든 행위가 고통이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살아남아야 했다. 무엇을 위해서? 어쩌면 그녀는 아들이 자신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엄마, 그래도 살아가야 해.’ 그런 희미한 속삭임을.

나는 남겨진 자들의 고통을 보며,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깨달았다. 우리는 비극적인 사건 자체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만, 그 이후 남겨진 이들의 삶에는 쉽게 눈을 돌리곤 한다. 그들의 슬픔은 뉴스 속 한 줄 기사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남은 생애를 지배하는 그림자이자, 매 순간을 함께하는 동반자다.

이 끝나지 않을 슬픔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진정한 공감과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안됐다’는 동정심을 넘어, 그들의 슬픔을 함께 짊어지려는 마음. 그들에게 ‘괜찮다’고 말하기보다는, 그저 그들의 곁에 묵묵히 있어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위로가 아닐까.

그 남자의 비극적인 선택은, 결국 수많은 이들에게 끝나지 않을 슬픔을 남겼다. 그리고 그 슬픔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 안에 숨겨진 그림자, 즉 열등감과 폭력은 과연 어디까지 우리를 잠식할 수 있는가. 이제 그 그림자를 직시하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성찰을 시작해야 할 때다.

9장. 우리 안의 그림자: 열등감과 폭력

8장에서 남겨진 자들의 끝나지 않을 슬픔을 이야기하며, 나는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이 남았다고 했다. 그 질문은 바로 ‘우리 안의 그림자’에 대한 것이었다. 뉴스 속 그 남자의 비극적인 선택은, 단순히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어딘가에, 그리고 어쩌면 우리 모두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열등감과 폭력의 그림자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열등감. 그건 참으로 보편적인 감정이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을 부족하다고 느끼는 순간을 경험한다. 학창 시절 성적 때문에, 사회생활에서 남들보다 뒤처진다고 느낄 때, 심지어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열등감을 느낀다. ‘나는 왜 저 사람처럼 되지 못할까?’,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될까?’ 이런 질문들이 우리를 괴롭히곤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어릴 적에는 언니와의 비교 속에서, 커서는 친구들의 화려한 삶을 보며 알 수 없는 초라함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 열등감은 때론 나를 더 노력하게 만드는 동기가 되기도 했지만, 또 어떤 때는 나를 깊은 절망 속으로 밀어 넣기도 했다.

문제는 그 열등감이 제대로 해소되지 못하고 쌓여갈 때다. 곪아 터진 열등감은 종종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발현된다. 물론, 뉴스 속 그 남자처럼 물리적인 폭력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극단적이다. 하지만 폭력은 늘 눈에 보이는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언어폭력, 정서적 폭력, 무관심, 배제… 이 모든 것들이 열등감이 뒤틀려 나타나는 폭력의 얼굴들이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려는 심리, 약한 존재에게 화풀이함으로써 자신의 무력감을 해소하려는 심리. 이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숨겨진 폭력의 그림자다.

우리 사회는 어쩌면 이 그림자를 더 키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끝없는 경쟁을 부추기고, 성공만을 찬양하며,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 이런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열등감을 숨기기에 급급하고, 그 감정을 건강하게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 ‘강해야 한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강박은 우리를 더욱 고립시키고, 내면의 그림자를 키우는 결과를 낳는다. 뉴스 속 그 남자도 그랬을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아버지’의 역할, ‘남편’의 역할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좌절감이 그를 더욱 깊은 열등감과 분노 속으로 몰아넣었을 테다.

나는 이 비극을 보며, 나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에게도 그런 그림자가 있을까? 누군가에게 질투를 느끼고, 나도 모르게 상대를 깎아내리려 했던 순간들. 나의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 애써 강한 척했던 순간들. 음, 솔직히 인정하기는 싫지만, 분명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다행히 나는 그 그림자에 잠식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해소할 수 있었지만, 만약 그때 나의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독자들에게도 이 불편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 안에는 어떤 그림자가 숨어 있는가? 당신은 언제 열등감을 느끼는가? 그리고 그 열등감이 어떤 형태로든 폭력으로 발현된 적은 없는가? 이 질문에 솔직하게 답하는 것이, 우리 안의 그림자를 직시하고 치유하려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완벽한 해결책은 없을 것이다. 열등감과 폭력은 인간 본성의 일부이자 사회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작은 인식과 실천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소통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그림자를 외면하지 않고 마주할 용기를 가지는 것.

뉴스 속 그 비극은 우리에게 섬뜩한 경고를 던졌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성찰의 기회도 주었다. 그 비극을 통해 우리는 인간성의 상실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목격했다. 이제 우리는 그 교훈을 바탕으로, 우리 안의 그림자를 치유하고, 더 이상 이런 참담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열등감과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사랑과 이해가 넘치는 따뜻한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 상처를 통해 얻어야 할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자, 앞으로 우리가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일 것이다.

에필로그

길고 긴 여정이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덫: 열등감과 파멸’이라는 제목 아래, 우리는 뉴스 속 한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둡고 불편한 그림자들을 마주했다. 열등감, 복수심, 폭력, 그리고 그로 인해 남겨진 끝나지 않을 슬픔까지.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동안 당신은 불편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과 마주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에서 작은 위로를 얻었기를 바란다. 혼자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보편적인 공감 속에서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나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나에게도 분명 그런 그림자가 있었다. 때로는 나를 갉아먹던 열등감, 때로는 누군가를 향해 치밀어 오르던 분노. 그런 감정들이 자칫 잘못하면 얼마나 위험한 길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결국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경고이자 거울이었다. ‘너희는 괜찮은가? 너희 안에는 어떤 그림자가 숨어 있는가?’ 하는.

가족. 그 이름은 여전히 내게 가장 소중하고 따뜻한 울타리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그 울타리 안에서도 균열이 생길 수 있고,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상처가 곪아갈 수 있다는 것을. 완벽한 가족은 없다. 완벽한 관계도 없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들이 모여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간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노력해야 한다.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때로는 용서하고 용서받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음, 사실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하지만 작은 시도라도 하지 않으면, 균열은 점점 더 벌어질 뿐이니까.

뉴스 속 그 남자의 비극적인 선택은, 결국 그 자신과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복수심은 결코 해답이 아니었다. 그것은 더 큰 고통과 상흔만을 남겼다. 하지만 우리는 그 비극을 통해 배웠다. 열등감이라는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법을, 폭력이 단순히 물리적인 형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남겨진 자들의 슬픔에 진정으로 공감하는 법을 말이다.

나는 이 책이 당신에게 어떤 거창한 해결책을 제시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삶의 문제들은 그리 단순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당신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가족과의 관계를 돌아보며, 타인의 고통에 조금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란다. 작은 인식의 변화가 모여 큰 변화를 만든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세상은 여전히 수많은 비극으로 가득할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는 희망을 찾아야 한다. 인간은 고통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며, 서로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존재니까. 당신의 작은 공감과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어쩌면 누군가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의 솔직한 열등감 고백이, 누군가에게는 큰 위로가 될 수도 있다.

이 책을 끝까지 읽어주신 당신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 책이 당신의 삶에 작은 울림이 되었기를,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름의 덫을 넘어 진정한 사랑과 이해가 꽃피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숨겨진 그림자를 직시하고, 그 그림자를 빛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면, 분명 더 따뜻하고 안전한 세상이 올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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